직전에 읽은 브람스는 좋아하세요…. 의 해설에 이런 문단이 있었다.
// 사강의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덧없음이다.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
그러나 어떤 사랑은 영원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비록 덧없더라도…
요약하자면 이 여자 미친 여자 아닙니다 이 여자 슬픈 여자입니다... 의 정석 같은 책이었다(한층 납작해진 후기). 브람스를 읽고 그 뒤에 작가 연보까지 보니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작가가 좋아져서 마음이 이끌리는 다른 책 두 권을 더 빌려왔는데 엎드리는 개가 그 중 하나였다. 줄거리는 없고 뒷표지에 덜렁 적혀있던 부분
이상하게도, 미친 듯이, 그는
이 침울하고 가혹한 여주인의 발아래
무릎 꿇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피든 목숨이든 보석이든,
무엇이든 바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을 다시 얻을 수만 있다면,
한 번만 더, 존경과 욕망이 뒤섞인
그 기묘한 표정을.......
그리고 아주 노란 표지.
전작보다 더 많이 나는 나이 차이(27살 게레와 50살이 넘는 마리아 비롱 부인)와 더 엇갈리는 사랑... 공통점을 찾자면 사강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깊은 공허함이 있는 반듯해 보이는 인물이며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을 향해 시선이 향해있다는 부분 같다. 둘 다 상대, 시몽과 게레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너머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냐? 하면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 난 폴도 시몽을 어떤 형식으로든 사랑했다고 생각했고(다소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구애를 승낙하는 형식이었음에도 어느 밤들을 충족시켜줬고 그것에 잠시나마 기뻐하는 묘사들이 있었으므로) 마리아 역시 결국에는 게레라는 상처를 가슴에 품은 채 복종하게 되었다고 받아들였다. 사강의 사랑은 참 복잡하고 입체적인 감정이다. 사랑하지만 사랑이라고 부르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냐,고 하면 그것은 또 아닌. 장담하며 말하기 어려운 관계들.
또 개인적으로 정말 슬픈 관계였다... 브람스의 두 사람이 상처입은 것보다 가늠도 할 수 없는 크기의 상처가 두 사람에게 남은 채로 끝이 났다. 시몽과 폴이 가슴에 오래 서로라는 잔재를 가지고 살아간다 해도 마리아가 마지막 장에서 입은 상처의 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그때서야 그녀 안의 사랑을 완성시켰다고 받아들였다.
그전까지 마리아는 늘 떠나는 쪽이었고 자발적으로 혼자였으며 주도권자였지만 처음으로 셋 중 무엇도 아니게 된 순간 게레를 자신이 사랑했음을 느끼지 않았을지. 또 읽으면서 게레가 묘사하는 마리아의 얼굴과 분위기가 아주 다양한 부분에 재미를 찾았다. 타인이 보는 비롱 부인은 아마도 첫 드장의 묘사처럼 단호하고, 무표정하며, 생기가 없는 모습이겠지만 마리아가 되고 또 게레의 사랑의 대상이 되면서 게레의 시선으로 보는 마리아는 때로는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또 때로는 나이보다 늙어보이고 종종 서른 같고 꿈에 차 있고 눈에 생기가 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검은 옷을 입은.
게레의 감정도 진짜 사랑이냐 하면은 조금 복잡할 테다. 시몽의 사랑만큼 순수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감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아마 마리아와 같이 게레도 그녀가 떠나려고,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느낀 그 순간 자신이 그녀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굴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자니 시몽의 사랑보다는 로제의 사랑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난 이런 감정이 사강의 사랑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좋아한다.
단 9주만에 일어난 한 편의 폭풍전야.
-
좋았던 부분들
1)
“우리 집어치울까? 이거 다 쓸모없어. 꽃들을 가지고 떠날 것도 아니잖아……”
“난 바로 이것만을 원해.” 그녀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 쓸모없는 것 말이야. 그리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129p
2)
여자가 웅얼댔다. "전 햇빛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햇빛은 살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도 쐴 수 있는 거잖아요? 저는 뭔가 제 맘에 드는 걸, 내 것을, 나만의 것을 원해요. 오직 나만의 것이요. 그런 다음에야 비가 오든 날이 좋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35p
3)
얼마 뒤, 최신 무어 스타일로 꾸며진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둘은 늘 보던 종이 위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이번엔 잠옷을 입은 채였다. 마리아가 어설프지만 뜻박의 재능으로 그린, 독이 있는 기이하고 커다란 꽃이 그려진 종이들이 하바나산 카펫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열대목과 운송 비용에 대한 복잡한 수식이 적힌(게레가 빨강, 노랑, 파랑, 세 가지 색연필과 자, 모눈종이를 이용해 계산한) 종이가 있었다. 얼핏 보기엔 신중하고 유능한 회계원의 완전무결한 계산이었지만, 마리아가 눈썹을 찡그리고 하나하나 따진다면 걱정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둘은 처음으로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고, 동등한 동료로 보였다. 마리아는 야자수와 강, 창가에는 창녀들이 있는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네모난 집을 그려 마침내 게레를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레비탕 탁자 위에 놓인 황동과 크롬으로 된 1930년대산 램프 아래서,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너무나 근면한 두 연인은 해가 뜰 때까지 사치스럽고 성공으로 가득 찬 끝없는 계획에 몰두했다. 138p
4)
여름의 첫날*이었다.
‘확실히 모든 건 동시에 일어나는 법이지.’ 정원을 가로지르다 하룻밤 사이 갑자기 개화한 마리아의 꽃들을 보며, 게레는 생각했다.
*하짓달(6월 21일-22일)을 말한다.
4)
그리고 릴 시의 해가 떠오른 그날 아침, 게레는 1930년대 스타일의 거실에 여전히 켜 있는 불빛과 싸워야 했다. 술 병은 텅 비어 있었다. 마리아는 눈을 감고 있었고, 게레는 여전히 닫힌 창문 앞 땅바닥에 드러누워 잠들어 있었다.
블라인드 틈으로 미끄러진 노란 햇빛이 질투하듯 마리아의 초췌한 얼굴을 때리고, 그녀의 눈꺼풀을 건드렸다. 눈을 뜬 마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다, 유리창에 난 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시간을 보낸 그녀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게레가 몸을 기대고 있는 쪽문을 향해 맨발로 다가가 단번에 문을 열었다. 문틀에 머리를 부딪힌 게레가 눈을 떴다. 그가 그녀를 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초췌하고, 고독하게.
5)
“나 기다릴 거지……?”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게레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맹세해줘, 마리아.”
마리아는 어슴푸레한 구급차 안으로 몸을 숙였다. 비현실적으로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어른댔다. ‘걸핏하면 경멸하는 표정을 짓곤 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때로 너무도 부드러워지는 얼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옆구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영원히 기다릴게, 이 머저리야…….”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구급차의 문이 닫혔다. 게레의 눈엔 이젠 자신과 그녀 사이를 가로막는 하얀 벽밖에 보이지 않았다.
구급차가 쏜살같이 떠났다. 사이렌 소리가 의미 없이 울려 퍼졌다. 차를 쫓아 달리던 개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섰다. 길 한가운데에서, 시내 쪽을 바라보다 마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젠가 게레가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개는 망설였다. 다시 길과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일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볍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6)
(번역가의 말 중에서) 이것을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번역 작업을 하는 내내, ‘복종’이니 ‘손종’이니 하는 단어를 떠올렸었다. 누군가가 무엇에 대한 복종이냐고 물어본다면, 사랑이 아닐까, 하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게레는 마리아에게 개와 같은 충성심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이 작품의 원제인 ‘Le chien couchant’은 사냥개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사냥감을 잡기 위해 포복하는 개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정을 갈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끝끝내 그 복종심은 마리아를 향한 것도, 사랑을 향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마리아의 시선에 투영된 게레 자신을 향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순간에도, 마리아가 그를 경멸하거나 그가 마리아를 원망하는 순간에도 복종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순종적 태도는, 게레에게서 젊은 시절의 눈부신 환영을 발견한 마리아가 일순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매력적으로 웃어 보이는 순간, 게레만의 전유물은 아니게 된다.
마리아는 문지방에 서 있는 것으로, 길 한가운데 미동 없이 머물러 있는 것으로 자신의 복종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때의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늘 혼자다. 그녀는 삶이 결국 자신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복종은 고독으로 완성되기에,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결말은 가장 쓸쓸한 승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개는 정말로 엎드리지 않았지만 떠났지만
두 사람은 복종한다. 무엇으로? 멈춤으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그의 연인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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