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꽃 핀 꽃 진 꽃
필 꽃 핀 꽃 진 꽃, 이원하
봄에 태어났으니 봄에만 살면 좋을 것 같아서
일 년 내내 꽃이 핀다는 섬으로 이사를 갔다
바다 한가운데 놓인 화분 같은 섬이었다
수국 옆에 짐을 구한 것을 시작으로
때가 되면
부용 옆으로 동백 옆으로 갈대 옆으로
주활 곁으로 파도 사이로 이사를 갔다
일 년 내내 꽃이 피는 곳이면
일 년 내내 봄일 거라 생각했으나 살아보니
녹아내리다가 우연히 시원했고
얼어붙다가 따뜻한 기운이 한두 번 찰랑였다
밥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시들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했고 생각하기를 멈췄다
필 꽃 안으로 빠져나가듯 들어가 밥을 먹었다
숨이 멎을 것처럼 안전했다 안전은 잠시뿐이었다
핀 꽃 위에서 포만감이
미끄러지듯 내려왔고 소화를 시키려
진 꽃
을 손에 들고
버리러 갔더니,
버리고 와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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